심영희는 태평양 건너 세계의 최강국이며 제일 부유하다는 아메리카란 나라에서 여자이종격투기 세계챔피언이 된 여인이다.
심영희 는1964년 중국 연길시 철남 동광촌에서 태어난 그녀는 일찍 8살 적부터 체육에 재질이 있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체육운동에서 남다른 싹수를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만도 연변의 스포츠 분야는 그 종목별로 아주 단조로왔던 상황이었다, 영희가 선택한 것은 육상종목이었다. 다리가 길고 동년배들에 비해 5센치메터가량 키가 더 큰 영희로 놓고 볼 때 이는 정확한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소학교시절에는 육상경기의 1500미터와 3000미터 달리기에서 늘 우승해 어릴 때부터 저력을 보여줬고 중학교 시절에는 배구, 농구 등 구기종목에서도 두각을 자주 나타냈다.
그녀가 무술에 취미를 느낀 것은 중학교 졸업하고나서 였다. 그 때인즉 중국의 영화관과 극장가에서 무술영화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그러는 사이에 또 몇년간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던차 1986년 서울아시아게임을 계기로 한중 사이가 급기야 가까와졌다. 그러자 오래동안 품었던 영희의 꿈도 실현될 희망이 보였다.
그래서 1988년 무작정 한국행을 한 그녀였다.
새롭고도 커다란 꿈을 갖고 한국땅에 발을 들여 놓은 심영희, 하지만 그녀를 맞은 한국사회는 이전에 그렇게도 동경하던 “무릉도원”이 아니었다. 우선 동포라고 하면서도 동족취급을 하지 않았고 인격과 대우면에서도 차별이 심했다.
한국에 체류하는 2년간 그녀는 음식점과 건설현장 등을 전전긍긍하면서 막노동에 투신하는 한편 체육관을 찾아다니며 무술기능을 연마하기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의 무술계 역시 한계가 있었다. 아니 중국조선족인 영희로서는 한국정상급의 무인들과 만날 수가 없었다.
때마침 중국의 스포츠 격투기분야에서는 미국 권투계의 타이슨이 새별로 떠올랐다.
이는 거의 사그라지던 영희의 가슴속에 새로운 욕망이 불타오르게 했다.
새로운 꿈을 찾아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미국은 가까이에 있는 한국이 아니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또한 멀리에 있는 나라이다. 비자를 받기가 힘들거니와 간다 해도 어떻게 자리를 잡는가 하는 것도 문제였다.
1999년 그녀가 태평양상공을 날아 넘어 미국으로 향할 때 그녀는 이미 이영희가 아닌 심영희로 탈바꿈한 뒤였다. 그리고 그 때의 그녀의 나이 36세, 여자로서 격투기프로로 되자면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였다.
그러는 사이에 수년간 세월이 훌쩍 지나갔으며 그녀는 어느 덧 합기도 5단, 중국무술 5단, 검도 5단 등 무술 종합 15단에 달하는 헤비급 무인으로 발돋음했다. 그 뒤 부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4차례의 감사장을 받으면서 심영희란 이름은 미국 로스안젤레스의 한인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심영희씨가 미국 이종격투기계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은 2006년 미국 로스안젤레스를 방문한 당시 한국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의 경호를 맡아해서부터였다.
그 이듬해 4월, 그녀와 맞붙은 상대는 먼저 번 세계여자이종격투기 챔피언으로 등극했던 멕시코의 이사벨 마르테네즈였다. 당시 심영희는 이미 44세가 되는 중년층이었지만 상대는 22살이 되는 프로로는 한창 나이라 할 수 있었으며 특기 또한 발차기로 세계에서 유명했다.
2회전에 거쳐 수차씩이나 심영희한테 깔려 일어나기에 실패한 마르테네즈는 3회전을 앞두고는 아예 기권해 버렸다.
믿기 어려운 기적이 이역만리 아메리카땅에서 일어났다. 세계가 열광했다. 세계챔피언상과 금띠를 받는 순간 심영희는 울었다. 오, 얼마나 큰 대가로 얻어낸 챔피언 등극이었던가?!
심영희씨는 미국에서 지금까지 45전 43승의 전적을 가지고 있다.차의 경기에서 무려 41차나 우승을 했다.
이런 공로가 인정되어 심영희씨는 미국대통령으로부터 수차례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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