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0년의 비밀이 담긴 조선의 타임캡슐, 조선 왕릉. 다섯 달에 걸친 왕의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왕릉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릉의 비밀을 알아본다.
- ‘순창원 도굴 미수 사건’, 조선 왕릉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2006년 1월, 서오릉 경내에 있는 명종의 원자 부부의 무덤인 순창원에 도굴 시도가 있었다. 도굴범들이 봉분 뒤편을 파내려간 것이다. 그러나 도굴범들은 무덤 속에 있던 단단한 층에 가로막혀 실패한다. 도굴이 불가능한 조선 왕릉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27명의 왕과 그들의 왕비가 모셔져 있는 조선 왕릉은 모두 42기다. 왕의 장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동영상 자료인 마지막 왕 순종의 장례 동영상과 장례식 사진을 통해 조선 왕릉 조성에 대한 단서를 찾아보았다.
- 왕의 장례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승하한 왕의 유해가 왕릉에 안치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5달.
왕의 장례인 국장은 그 절차만 총 69개에 달할 정도로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그 중에는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얼음을 이용해서 빙반(氷盤)을 설치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무려 90벌의 옷을 입힌 대렴(大斂)도 있다.
이러한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왕릉도 엄격한 국장 예법에 따라 만들어졌다.
이 국장제도를 완비한 이가 제 3대 왕, 태종이다.
그렇다면 태종의 능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기록에 의거해 태종의 능 내부모습을 복원해 보았다. 그 결과, 석실의 덮개돌 무게만 무려 50톤이 넘었다.
어마어마한 돌을 캐고 다듬어서 능까지 운반하는데 엄청난 공력이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42기의 조선 왕릉은 모두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을까?
- 최초공개, 조선 왕릉 터 발굴 현장. 왕릉에 사용된 회격의 비밀은?
2008년 서울 내곡동에 조선 왕릉 터가 발굴됐다. 세종이 처음 묻혔던 곳으로 알려졌으나, 발굴조사 결과는 전혀 뜻밖이었다. 기록에 나와 있는 석실묘가 아닌 석회, 모래, 황토 등을 섞어 다져 만든 회격묘였다.
무덤의 깊이 등 규모와 조성 방법, 그리고 터의 위치를 근거로 추정해본 무덤의 주인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이다. 그렇다면 조선 왕릉의 내부구조가 석실에서 회격으로 변한 것은 언제이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왕릉을 만드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역사였다. 특히 석실을 만드는 데 따르는 백성들의 부담과 폐해는 컸다. 태종의 능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부역군은 1만 명이 넘었고, 돌을 운반하다가 죽은 사람이 1백여 명이나 됐다.
이에 세조는 거대한 돌을 사용하는 석실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결국, 세조 이후 왕릉에는 석회혼합물로 만든 회격이 석실을 대신하게 되었다.
방수, 방충은 물론 콘크리트와 같은 단단한 강도를 지닌 회격에는 당대 최고의 과학이 담겨 있다.
- 600년 동안 무너지지 않은 봉분의 비밀, 부장품에 담긴 조선 왕실의 철학은?
조선 왕릉의 봉분, 즉 능상은 60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제 모습을 지켜왔다. 그 견고함은 능상 속에 석회, 황토, 모래로 이루어진 석회혼합물을 사용해 내구성을 강화시킨 것에 있다. 그렇다면 조선 왕릉 속에는 어떤 부장품이 들어있을까?
때로는 쓰고 있던 물건이 그대로 넣어지기도 했으나, 대부분 작고 거칠게 만든 부장품이 넣어졌다. 거기에는 왕릉 조성에서와 같이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예를 갖추면서도 사치를 멀리하려는 조선왕실의 철학과 백성들의 피와 땀을 아끼는 애민사상이 녹아있다.
역사추적 10회 조선 왕릉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2009.2.7.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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